나의 이야기

할머니와 엄마

마음 아저씨 2020. 9. 14. 12:03

우리 할머닌 치매셨다.

6남매중 막내였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모시는 상황이었고

할머닌 우리 집 조그만 방에서 정말 짐승같은 삶을 사시다 

84살에 돌아가셨다. 

사는 이도 힘드시고 

수발하고 시중드는 이도 힘든 세상살이.

초등학교 2,3학년이었을 그때의 기억은

치매는 걸리지 않아야 된다, 

그래도 부모인데 잘 해야지 하는 생각들이었었다. 

그래서 달달한 커피를 정말 좋아했던 나에게 

재작년 어떤 지인이 이렇게 달달이 커피를 마시면

치매걸릴 수 있다는 말을 하셔서

그 좋아하는 달달이를 바로 당장 끊을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정신이 많이 안 좋으셨다. 

그래서 나주 정신병원도, 이런 저런 사설 요양원에도 계셨지만

늘 초췌한 모습으로 쉬지 않고 말을 하시거나

힘들땐 비몽사몽의 모습으로 집에 가고 싶다 하셨다. 

그래서 집에 모셔 오면 

온 집을 들쑤셔놓고 잠은 안 주무시고

약이 과할 때 누워만 계시다가

약발이 떨어지면

동네방네 소리치면서 생활을 할 수 없게 하셨다. 

그럼 또 나주정신병원으로 모시고 가자고

아버지가

여수에 있는 내게 전화를 주시면 

장성 집으로 가서 나주로 가는데 

가는 길이 나주정신병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뒷자리에 계시던 엄마는 

운전하는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소리소리 지르며 안가려 하셨다. 

우여곡절끝에 입원시키고 오는 길

차안에서 아버지와 난 아무말이 없었다. 

이 현실이 언제까지 갈까

우리 엄마는 언제까지 저런 삶을 살아야 하나

깊은 한숨과 낙망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어쩔땐 서울 청량리 정신병원에 계시단 소리를 듣고 

여수에서 프라이드를 몰고 

서울로 갔다. 

우리 이모는 미리 오셔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어느 날은 이모 집에 들르셔서 이모 폐물을 가져가버리시고~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럼 우리 엄마 입장에서 보면

태어날 때부터 위에 딸둘이고 아들을 기대했는데 

또 딸이라 어떠한 환영도 못받고 깊은 한숨과 함께 태어나셨으리라.

그래서 자신의 어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사시려했고

기억력 좋고 머리도 좋아서 뭔가를 잘 익히고

손재주도 좋아 그당시 수 라는 것을 잘 놓으셨다 했다. 

그러다 해남의 좋은 집안 막내 아들과 결혼을 해서 

뭔가 이뤄보려 했는데 

딸은 커녕 아들도 못 낳았으니

괄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친정에서도 환영을 못 받았는데

시집와서도 괄시와 눈치를 보며 살아오셨을 우리 엄마!

오매불망 기다렸던 아들이 태어나고

그 아들이 돌이 지날 무렵 아버지와 상의해서 

광주로 이사를 하셨다. 

광주 가서 남은 생 동안

뭔가를 이뤄보리라 하는 마음 가득 안고 오셨을텐데

갈수록 가세는 기울어가고

기대했던 아들을 통해

자신이 못다한 것을 이뤄보려 했지만

아들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다 생각되어갈 무렵

나 고3 후반기에 정신줄을 놓아가셨다. 

 

손재주가 좋아 칼국수할 채를 가늘고 정갈하게 잘하셔서

그럴 때 아버지도 나도 행복하게 웃으며 잘 먹었었는데~

코미디 웃으면 복이와요 한 프로에서

남철 남성남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 꿈에~ 했다고 

그 이야기를 하시며 꿈에~  또 무슨 이야기 하시고 꿈에~를 하시며

많이 많이 재미있게 나와 함께 웃었었는데.

오늘 지체 어머니 치매를 위해 기도하다 

돌아가신 울 엄마가 생각난다. 

 

17평 주공 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

퇴근하니 엄마가 집앞 계단에 앉아 계신 거다.

얼마나 놀랐는지~

엄마 오셨다고 반갑다고 어서 오세요라는 말은 못할망정

아 우리 엄마가 이젠 학교까지 와서 소란피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 못된 자식이었다. 

엄마는 자고 있는 예지가 귀엽다고 안으신다 하셨는데 

난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봐 안된다 하고

나중엔 결국 화를 내시고 소란을 피우시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 안에 살기가 느껴졌었다. 

엄마 입장을 너무나도 가져오지 않고 난 그전 피해를봤다고만 생각한

너무나도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그러기에 엄마의 치매로 고생하고 있을 지체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알 것 같다. 

언제 돌아가시나~

언제까지 고생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죄책감에 죄송해하고.

 

장성집에 다녀오면서 되뇌이었던 말씀은 

욥기 23:10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걷다가 울다가 논두렁을 걸어 기차타러 가면서

많이 되뇌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하시다 내 나이 34살에 돌아가셨다. 

그당시는 핸폰이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가 집으로 전화를 하셨고 현미가 받아서

학교로 전화를  했는데 

현미의 전화를 받고 돌아가셨다는 그 말에 

너무너무너무너무 죄송했고 또 죄송했다. 

 

내가 좀 더 철이 일찍 들어 

우리 엄마 마음을 더 알아드리고 함께 했더라면

그래도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더시고 가셨을텐데 하는 후회스러움! 미안함! 죄송함!

 

아버지여 지금 치매 어머니를 돌보고 계신 자매 마음에

주님 새마음으로 임하셔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만지시고 평강가운데 거하게 하시어

주님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할 힘을 주시며

그 어머니의 뇌와 정신에 함께 하심으로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치료해 주시길 소원 또 소원합니다.

기도만 하고 안 들어주실텐데 하는 믿음없는 모습 따라가지 아니하고

주님 만지심을 기대하며 실제로 역사해 주시길 소망하는 믿음 커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그 가정에 주님의 샬롬으로 함께 해주시길 소망 또 소망합니다.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