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 현미 천국 이사 1주년 나눔

마음 아저씨 2020. 7. 20. 15:15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무엇을 바라는 삶이 내 마음이 웃는 삶일까?

명퇴하기를 너무너무 바랬었다. 그럼 우리 현미랑 여기 저기 갈 곳도 많고 사주고 싶은 것도 먹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었다. 그런데 우리 현미가 없으니 별 낙이 없다. 그래서 요즘도 문득 문득 이러다가 돌아버릴 것 같은 극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건 내가 전혀 생각지 않았던 현미없는 이 삶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찬동할 때 이다. 내겐 현미만 있으면 됐다. 갈수록 갈수록 유일한 내 편이었다. 사회성 없고 늘상 나 자신을 짜잔하게 여기며 나 스스로를 못마땅해 하고 무시감에 휩쌓여 살아왔던 나인데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그 작고도 작은 가능성 하나를 보고 내게 시집 와준 고마운 사람이 현미였다. 그래서 지금도 눈물나게 고맙고 감사하다. 부모님 형편 다 알아,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것도 다 알아,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도 다 알고도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첫 발령지인 여수 개도에서 올라오면 시민회관 건너편 삼겹살 집에 데려가 자신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한 점도 안 먹으면서 나 좋아한다고 고기 구워주면서 많이 먹으라 하고 빡빡한 레슨 스케줄로 화순까지 다니면서 어쩔 땐 점심도 건너뛰고 레슨해서 모은 돈으로 에버랜드 가자해서 결혼 전 그 무서운 청룡열차 같은 것도 타면서 무서움에 떨면서도 재미나게 놀고 오고 그 바쁜 대학원 시절 우리 어머니 입원하신 곳에 일찍이도 와서 필요한 것 사드리고 간호도 하고 우리 아버지 술 좋아하시니까 디자인이 좋다면서 이 술, 저 술 사 갖고 가서 시원한 매운탕 끓여 대접한 사람이 현미였다. 참 이야기도 재미나게 잘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장인어른께서 처형 중학교 졸업식 때인가 졸업식장을 향해 꽃다발을 흔들면서 어여 빨리 가자 가셔선 현숙아 졸업 축하한다 하고 꽃다발을 건냈는데 오는 길에 하도 흔들어서 꽃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버렸다는 이야기를 여기 이 소파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작년에도 했었는데 들어도 들어도 재미났었다. -700만원으로 시작한 10평 짜리 집에서 1년 동안 열심히 여수에서 광주 다니면서 시립합창단 반주하고 레슨 한 돈 모아 1년 만에 17평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우리 예지 낳고 시장갈 때도 서로 먼저 안겠다 하고 시찌다 교육으로, 한글나라로 영어 테잎으로, 책읽어주고 만성리로 흥국사로 소호 요트장으로 부지런히 데리고 다녔었다. 예솔이 태어나선 토요일에 일찍 애들 데리고 요트장 가서 자전거도 태우고 음료수도 사주고 신나게 놀게 하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림도 그리게 하고, 또 지리산으로 섬진강으로 가서 모래 놀이도 물놀이도 실컷 하고. 그럼 또 옆에서 전 지져주고 먹을 것 챙겨서 맛나게 먹게 하고. 요리도 잘해서 식당에서 맛있게 한번 먹은 후 내가 맛있따 하면 바로 집에 와서 요리해서 턱 하니 내민다. 자기야 맛있지? 하면서. 지금 같았으면 리액션도 더 크게 마음으로 화답하며 미리 알아서 너무 맛있다 라고 말해줬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자 아버지 모시고 살자면서 그러려면 주택이 애들에게도 아버님께도 좋다고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럼 우리 아버진 선그라스 멋지게 쓰시고 아랫집 아주머니랑 친해지셔서 찜질방도 다니시고.

 

이사는 광주로 왔는데 나는 여수나 구례에 있을 때 출장이 있어 일찍 오면 너무 반갑게 맞이하고 완도나 보성 등 외지로 출장을 갈 땐 같이 가서 점심먹고 카페에 있으라 하고 난 일보고 다시 와서 같이 있다가 오는 출장이 드라이브였었다.

 

마음교회 와서 주일학교 반사로 모임 인도자로 규훈형에게 배운 것을 자기것으로 잘 소화해서 자신이 돕고 있는 이들을 리틀 규훈처럼 잘 도왔다. 돕는 멘트가 거의 비슷~했다. 대주 아파트에 살면서 순천대, 광신대, 호신대 출강 나가고 피아노 연습도 레슨도 하면서 연주도 많이 하고. 사실 미국 유학도 가고 싶어 했지만 인간적이라 여기고 포기하고 주님 앞에서 교회에서의 찬양반주자로 아니 찬양 사역자로의 삶을 귀히 여기며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찬양을 하였었다. 어느 날 내가 수요일 재끼고 어디 가자 하니까 나는 이 찬양 반주를 하나님 앞에서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표현했었다. 그러다 2014717일 광주산부인과에서 보호자랑 같이 오라 한다해서 같이 갔더니 유방암 2기로 했었는데 현미는 수술하지 않고 쉬면서 기도하면 될 것이라 했다. 워낙에 잘 참는 스타일이라 스트레스를 받아도 혼자 삭히는 스타일이었던 것이, 그리고 워낙에 레슨생도 많고 연주도 하고 싶어서 딸, 아내, 엄마의 역할을 해 내려면 타이트하게 분초를 쪼개면서 잠도 잘 안자고 살아왔던 것이 그리고 쉬지 못하게 했던 것이 너무 아쉬웠다. 수술 안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라면 들어주실 것이네 하면서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소 라고 했었다. 그 전에 처형께서 유방암에 걸려 수술받고 형님의 지혜로운 도우심으로 잘 회복되셨기에 우리 현미는 주님 도우심으로 당연히 회복될거라 여겼었다. 그래서 멕시코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몸 상태도 좋았었는데 결국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재발이 되었었다. 은혜를 베푸사 여수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슴 졸이며 땡땡이도 치고 맛난 것도 먹고 성은이, 하은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과일도 갖다 주고 여기있는 자매님들이 수시로 돌아가면서 해주신 반찬, 과일 등을 맛있다 하면서 정말 잘 먹었던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오직 주만이 간증을 듣다보면 고생 고생하시다 소천하신 분들이 많던데 우리 현미는 뼈가 썩어가는 고통없이 딱 이틀 항암이라는 한방으로 주님 품에 안기게 하심도 너무 감사하다. 우리 현미 떠난 후 좋은 효소, 걷기 운동, 최근의 원준상 선교사님 치유 소식 등을 들었을 때 아 우리 현미 1년만 더 있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하나님~~~ 하는 원망하는 마음들이 올라왔었고 거의 울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힘들고 버거운 1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나와 우리 예지 예솔이 현미 먼저 이사 가버리니 하나님 신앙이 이다지도 없는, 구원받지 못할 정도의 내 믿음임이 확인되어진 것이고 하나님께선 이 모든 걸 아시고 내 믿음 예지 예솔 믿음세우시려고, 그래서 진짜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임을 다시금 보게 된다. 만약 내 이 믿음이 이리도 부족한지 모르고 현미와 같이 잘 살다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섰는데 현미는 천국에 들어가고 난 지옥에 간다면 그 얼마나, 진짜로 미쳐버릴 그 상황이 영원한 실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21: 3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현미 저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다시는 죽음이 없고 애통 곡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 보여지니 얼마나 좋을까 싶어 눈물나게 너무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 그래~ 이 말씀이 진짜이다. 누구든 한번은 다 죽는다. 난 친구들 중 결혼도 1,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1, 각시가 먼저 간 것도 1, 딸 결혼하는 것도 1번이다. 아마 친구들 중에 내가 1번으로 주님 품으로 갈 것 같다. 언제 일지 모르지만 빠르면 오늘 내일 일 수도 있고 길면 20~30년 이겠지. 그리고 주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우리 현미처럼 믿음 세우고 하나님 앞에 서서 영원토록 주님 품에 안겨 영원히 주님 찬양하며 살아가는 그 생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가! 하나님은 진짜 사랑하는 자를 원하신다. 그 자를 신부라 하신다. 나는 우리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가? 너무 부족한 사랑이다. 그러니 지금은 은혜의 때요 기회의 때인 것이다. 주님 심판대 앞에 설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하나님 중심 세우고 세워서 아버지 마음 기쁘시게 해 드리고 아버지의 마음 시원하게 해 드리는 천국의 삶 살아가다 주님 품에 안기길 소망한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영혼이 주님으로 인한 삶, 그래서 훗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 주님과, 현미 자매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시는 우리 되길 소망 또 소망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