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일하심의 역사
우리 예지와 예솔이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엄청난 수고와 인도하심이 느껴지는 아침이다.
우리 장인께서는 성일교회 장로님으로 계셨는데 학생들과 함께 간 여름수련회에서 수영하시다 생을 마감하실 수 있던 상황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나셔서 그 후 목회의 길로 들어서셨다. 그리고 숭일중학교 교목으로 계시다 1984년도에 지금의 유스퀘어 근처인 화정초 부근 영화아파트 상가 2층에 개척을 하셨다. 그때가 현미와 내가 대학1학년이였다. 내 기억으로 2학기 즈음 이사를 오셨는데 내가 사범대 음악교육과 성악전공이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현미에게 성가대 지휘하게 섭외하라는 명을 받고 전대 정문앞 너랑나랑이라는 다방에서 만났다. 거기는 내가 대학 아르바이트로 DJ를 하던 장소였다. 거기서 성가대 섭외 요청을 받고 당시 서남교회 주일학교 반사로 있기에 금년까지는 반사와 성가대 지휘를 병행하고 내년부터는 선민교회로 옮기자했다. 그렇게 현미를 알게 되었고 현미가 리죠이스에 가자 가자해서 지금의 조목사님 만나고 신앙의 눈을 뜨게 되었다. 그즈음 현미는 거의 날마다 레슨하고 토요일은 점심도 거르면서 화순까지 가서 레슨한 수입으로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고. 그러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 광주세광학교 강사로 있을 때 배우자감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세상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현미가 그 이상형이었던 것을 그제서야 알고 리죠이스 집회가는 버스에서 같이 앉아서 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같이 찬양하며 같이 살면 어떠냐고 프로포즈를 했다. 그런데 세상에 내 형편을 너무나 뻔히 알고 내 건강도 안 좋음을 알았음에도 그러자 한 것이다. 참 지금 생각해도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 한 것이 바로 우리 현미와 결혼한 것이다. 요즘도 가끔 어쩌다 나를 선택했을까 싶어 현미야 고마워 고마워 한다. 현미 입장에선 지금 조목사님과 함께 개척교회할 멤버가 결혼 대상자였는데 내가 그 멤버였고 그 다음으로 내 안의 가능성을 보고 오케이 한다 했다. 참 그래도 그렇지 나같은 것을 선택하다니 그 탁월한 안목에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장인어른은 장로님때가 더 좋았고 목회하시고선 힘든 날들이 훨씬 많았다 했다.
하지만 그 중에 단 하나 가장 좋은 것은 목회하심으로 인해서 현미와 내가 결혼을 했고 우리 아이들이 태어난 것이다.
오늘 예솔이가 오늘 톡으로 보면대 위에 편지가 있다 해서 올라가서 가져와보니
엄마아빠를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 더 잘 키워갈께 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 장인 어른께서 목회를 하게 주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 예지는 더 신앙으로 올인하려 하고 있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