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너무하시다는 생각
'하나님 너무하시다'는 생각이 있었거나 지금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마음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 믿음 좋은 사람은 아파도 당연히 회복될거라 생각했다.
교회오빠의 주인공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 현미가 그렇게 떠나가게 될 줄은 정말로 정말로 몰랐다.
현미가 중환자실 직전의 1인실에 갈 때만 해도 내일이면 현미가 떠난다는 건 정말이지 단 1%도 감지하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땐 조금 입원하다 다시 퇴원해서 같이 살아갈줄 알았다. 그날이 토요일이었고 현미 떠난 날이 주일이었는데 토요일 입원하면서 아이들에게 월요일에 아빠가 충청도에 다녀올 일 있으니 이날은 너희가 엄마 옆에서 병간호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몰라도 너무너무 몰랐던 것이다. 그리곤 주일 새벽 급격히 병세가 안 좋아져서 중환자실로 갔었고 그날 저녁 우리 현미가, 나라면 몰라도 우리 현미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날줄은 정말이지 정말이지 몰랐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데려가시려면 저를 데려가셔야지 교회에 할일도 많고 저렇게 훌륭한 믿음이 있는 우리 현미가 어째서 무엇때문에 먼저 떠나가야 한단 말입니까?
더이상 현미의 피아노 반주의 찬양을 못드린다는 것은 너무너무 하나님도 손해 아니십니까?
저 손은 우리 교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겐 우리 아이들에겐 너무나도 그가 소중하고 필요합니다.
그렇게 그가 떠나가고 모든 건 절망뿐이었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 인생사는 의미가 없어보였다. 극심한 우울 그 자체였다.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깊은 흑암같은 삶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하루하루 어거지로 살았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현미를 믿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어찌 천국 근처에나 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하기에 니 실체가 이것이야를 온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우리 현미를 먼저 데려감이셨던 것이다. 넌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그건 죽은 믿음이야, 너의 구원은 꽝이야를 보여주심이었다.
지난 주 시민의 숲을 걷는데 손녀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하지만 그는 앞만 보고 가느라 손녀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어서 손녀가 가방걸렸다는 소리도 잘 안들리는 듯 했다. 그걸 보고선 아 난 저것 잘 할 수 있는데~ 할아버지 하고 오면 온 마음으로 안아주고 시민의 숲을 거닐면 이것 저것 설명도 해주고 하하하하 웃으며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는데,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신나게 영산강변도 달릴 수 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이 이 정도인데 우리 드로와 예지는 얼마나 더할까?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어가게, 하나님 닮아가게 하신데 있다. 그걸 이뤄가시기 위해 우리 생을 인도하심인 것이다. 무엇을 하든 어떤것을 하든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음이다. 이제는 이 마음이 조금씩 만나진다. 하나님 닮아가야 이 땅에서도 천국이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것 아닌가!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다.